몇 시간 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도 벽도 온통 아이보리색이었는데 어떻게 빛이 들어오는지 아무리 내려가도 시야가 훤했다. 자연광이 여기까지 닿게 만들다니, 설계가 기가 막힌걸! 머리를 쓸어올리며 앨이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오후에 슈우이치와 마주쳤던 일과 안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입이 떨어지지가 않아서 어떤 위로도 해주지 못했는데 어쩌면 슈유이치에겐 나에게 섭섭해 할 여유마져 없었으리라. 변변치 못한 위로 보다 그렇게 아무말 못한게 나았을지도 모르고... 안나. 어제의 안나는 파란 루비처럼 뾰족하게 이야기했다. 앨이 지난주에 제출한 기획이 마음에 안드는 모양인데, 말투와 그녀가 선택한 단어 하나하나가 단단한 무기 처럼 마음에 박혀서 앨은 어제 대화에서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묵묵히 듣고 대충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건물을 나왔는데 앨답지 못하게 눈물이 고여서 잠시 길에 서 있었다. 앨은 영민하며 아이디어와 재주가 많고 긍정적인 성격이어서 어제와 같은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더 계단을 내려간 걸까. 빛이 비추는 계단이 끝나고 텅 빈 방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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